39호 컬쳐 약국 <올리비에 드브레: 마인드스케이프> 展
“풍경 화가이기를 거부한다. 나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 앞에 서 있는 내 안의 감정을 그린다.
올리비에 드브레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자신의 오감을 발휘해 풍경 이면의 것들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과연 그가 전하고자 한 그만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Writing 편집실 Photo·Data 수원시립미술관
전시실 1. 1부 만남, 추상으로 전시 전경
우리는 똑같은 풍경을 봐도 각자 다른 감상을 이야기한다. 올리비에 드브레(Olivier Debré, 1920~1999, 이하 드브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서정 추상의 대가인 드브레는 일상과 여행에서 마주친 풍경을 똑같이 재현하기보다 자신이 느낀 색채와 구성을 활용해 자연이 주는 울림을 전하고자 했다. 그런 그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7월 9일부터 10월 20일까지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초기 추상부터 말년에 이르는 회화, 영상, 사진 등이 소개됐으며, 60여 년에 가까운 드브레의 예술적 여정도 함께 조명됐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만남, 추상으로’를 주제로, 2부와 3부는 ‘심상 풍경의 구축’, ‘여행의 프리즘’으로 나뉘었다.
1부 전시 공간은 드브레의 학창 시절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으로 기획됐다. 그중 파리 에콜 데 보자르(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의 건축 공부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의 인연, 1940년대 초 미술로의 전향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소개되는 한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의 만남이 드브레의 입체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작품 ‘풀밭 위의 소녀’(1940)도 공개됐다. 해당 작품은 인상주의의 구상 방식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인상주의 작품의 특징인 흐릿한 얼굴과 뭉개진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살인자, 죽은 자와 그의 영혼’(1946)은 프랑스가 나치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직후에 제작된 작품으로, 강제수용소의 인질과 희생자, 나치, 살인자 등의 모티프를 자신만의 독특한 상징적 기호로 표현했다.
풀밭 위의 소녀, Little Girl in the Grass (Petite fille dans l herbe), 1940 © CCC OD - Tours © Adagp, Paris
살인자, 죽은 자와 그의 영혼, The murderer, the dead and his soul (l’Assassin, le Mort et Son Âme), 1946 © CCC OD – Tours © Adagp, Paris
예술 장르 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그의 회화도 조각과 설치처럼 공간을 차지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2부 전시 공간에는 이러한 특징이 포함된 작품은 물론, 1959년 뉴욕 노들러 갤러리의 추상 작품 그리고 1980년대 후반까지의 작품이 전시됐다. 이 시기는 드브레의 전성기로, 회화적 표현과 색채의 범위가 확장됨과 동시에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 확립된 시기이다. 특히, 사각 형태의 붓질과 섬세하게 쌓아 올린 반투명의 물감층이 두드러진 시기로 평가된다.
1960년대 드브레는 미국을 여행하던 중 대형 회화 작업을 하던 마크 로스코(Mark Rothko)를 만난다. 마크 로스코와의 만남 이후, ‘거대한 엷은 검정’(1962)과 ‘연노랑색 기호 인물’(1965)에서 색채 실험을 진행하며, 찬란하고 투명한 음영 효과를 위해 안료를 연속적으로 얇게 쌓아 올리는 경향을 보였다.
1980년대, 드브레는 새로운 풍경과 빛을 발견하기 위해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중 가장 큰 영감을 받은 장소가 프랑스 투르(Tours) 루아르강변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루아르강의 모습을 작품에 담으려 애썼으며, 이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자신의 시각적 경험과 해석을 통해 재현하려는 특징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길이가 각 3m에 달하는 ‘루아르의 연보라’(1985), ‘검은 얼룩과 루아르의 황토빛 분홍’(1985~86)이 있다. 한편, 이 시기는 파리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 Française)의 대형 무대 가림막 제작을 시작으로, 자신의 작업 범주와 표현의 깊이를 확장해나간 때이기도 하다.
루아르의 흘러내리는 황토색과 붉은 얼룩 Poured Ochre of Loire Red Stain(Ocre Coulé de Loire Trace Rouge) 1987 © CCC OD – Tours © Adagp, Paris
폭풍우치는 루아르강의 진보라와 흰색 Dark Purple and White of Storm of Loire(Violette Foncée et Blanche d_orage de Loire) 1981 © CCC OD – Tours © Adagp, Paris
전시실 2. 2부 심상 풍경의 구축 전시 전경
전시실 3. 3부 여행의 프리즘 전시 전경
투르의 루아르강처럼 드브레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장소들이 있다. 3부 ‘여행의 프리즘’에서는 드브레에게 영감을 준 장소에서 창작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해외로 떠난 다양한 여행에서 그는 끊임없는 영감을 얻었는데 특히 노르웨이, 미국, 멕시코, 일본 등의 경험이 주된 주제로 등장했으며, 이 시기에 드브레는 작품에 최대한 다양한 색을 사용하려 했다.
한편, 1980~1990년대의 유명 작품으로는 노르웨이를 여행하고 그린 ‘길고 푸른 선들(스바뇌위, 노르웨이)’(1974), ‘겨울 슬레톨렌의 흰색 1, 2’(1988)가 있다. 이 중 1979년 옵달(Oppdal)과 1988년 슬레탈렌(Sletthallen)에서 그린 ‘겨울 슬레톨렌의 흰색 1, 2’(1988)는 하얀 회화 연작으로, 북유럽의 분위기를 잘 반영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을 통해 당시 드브레가 실험했던 다양한 흰색의 조합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1966년 노르웨이 여행은 드브레의 작품에 밝은 색상과 유동적인 재료 사용을 도입하게 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드브레의 유연한 붓질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1997년 멕시코 여행에서 느낀 감정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았으며 제목을 통해 장소가 불러일으킨 감정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드브레는 무대미술에까지 손을 뻗었는데 그중 1997년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초연한 공연 은 드브레와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의 현대무용가 캐롤린 칼슨(Carolyn Carlson)이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이 공연에서 드브레는 공식적으로 무대미술과 의상디자인을 담당했다고 알려졌지만, 캐롤린 칼슨에 의하면 제목과 안무 또한 드브레의 생각을 거쳤다고 한다.
실제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자신의 오감을 통해 마음에 새겨둔 색채와 구성으로 자연풍경의 깊은 울림을 전하고자 했던 올리비에 드브레. 여행과 무대미술 등 일련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드브레의 캔버스에는 실제 풍경의 형태가 사라지고, 내면화된 공간과 정서만이 남게 됐다.
길고 푸른 선들(스바뇌위, 노르웨이), Long Blue Bars(Svanøy, Norway) (Longues Barres Bleues(Svanøy, Norvège)) 1974 © CCC OD - Tours © Adagp,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