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1호 소소한 만남-인재를 보는 안목과 지식 경영 리더십 갖춘 정조_ 정치학 박사 박현모


소소한 만남



Writer 강일서 Photo 김오늘



 



인재를 보는 안목과 지식 경영 리더십 갖춘



정조



소소한만남 



 



고작 열한 살에, 광기에 사로잡힌 아비의 참담한 죽음을 보고, 노론의 살해 위협에 몇 번이나 시달렸지만, 그는 절제되고 포용하는 삶을 살았다. 보통사람 같으면 조현병에 걸리거나 연산군처럼 정치 보복을 일삼는 폭군으로 일탈하고 말았을 정조의 삶, 그런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버렸다.



 



먼저 정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할 때 처음에는 다산에 관심 있었습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라는 책을 보니, 정조가 어전회의에서 얘기했던 내용이 정리된 것이 많았 죠. 특히 정조가 아전 같은 하급 공무원들을 어떻게 의식했는지 궁금해졌죠. 그렇게 정약용에 영향을 준 정조에게 주목하고 됐고, 『정조실록』까지 보게 됐 습니다. 그러면서 정조 시대의 정치세력들, 당시의 문체반정과 학풍, 또 서울 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네트워크 등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조의 인간적 매력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 그는 열 살 어린 나이에,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참담한 죽음을 목도했으며, 할아버지 명으로 아비 이름도 언급하지 못 했습니다. 또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노론의 살해 위협에도 11번이나 시달렸는데 어떻게 그런 절제된 삶과 포용하는 삶을 살았는지 그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정조가 당시 파격적인 인재 등용을 단행하고, 지식 경영인의 자질을 지녔다고 하는데, 어떤 모습인가요?



정조의 일화 중 ‘시궁창에 더러운 데 핀 꽃을 봐라, 화원에 있는 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건 인재는 좋은 가문이라고 해서 잘하는 것 도 아니고, 천한 신분이라고 해서 못하는 것도 아닌 신분을 넘어서 잘하는 사 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좋은 인재를 써서 나랏일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인재 탕평입니다. 조선은 숙종 이후부터 노론이 거의 인재를 보는 안목과 지식 경영 리더십 갖춘 정 조 100여 년간 집권해 정조 때는 당파가 워낙 크기 때문에 노론이 아니면 대부 분 요직에 못 올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가장 소외되던 남인 중에서 이가환, 채제공, 정약용 등을 등용합니다. 또 좌제공 우종수라고 불릴 만큼, 일을 협력해서 끌어가는 남인의 채제공과 나랏일이 되게 하는 노론의 김종수를 두고 두 정승을 중심으로 견제하게 합니다. 이렇게 정조가 탕평을 펼치며, 인재를 직접 등용했기 때문에 잘 하려는 마음도 있었고, 실제로 일에 적합한 인재들과 함께 수원화성과 같은 많은 일을 진행했습니다.



또 정조는 인재를 쓸 때 첫 번째는 그 사람이 나라에서 추구하는 정책을 얼마 큼 이해하고 따라가려 하느냐, 이것을 중시했습니다. 두 번째는 실제로 그 일 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봤습니다. 정조는 과거 합격만으로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지 평가할 수는 없다며, 규장각 안에 국가에서 일을 맡기면 기획하고 관리하 는, 실무를 제대로 진행할 수 있는 특별교육 및 연구 과정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 를 운영합니다. 이를 통해 당시 정조가 추구하는 목표에 잘 따라오고, 실제로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배출합니다.



 



규장각의 설치 배경과 어떻게 이용했는지 알려주세요.



규장각은 복합적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아버지 사도세자와 연결하며 노론은 물론 대다수가 반대하고, 그를 지지한 사람은 노론의 홍국영, 남인의 채제공 등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동덕회’라는 모임인데, 正 정치학 박사 박현모祖 고작 열한 살에, 광기에 사로잡힌 아비의 참담한 죽음을 보고, 노론의 살해 위협에 몇 번이나 시달렸지만, 그는 절제되고 포용하는 삶을 살았다. 보통사람 같으면 조현병에 걸리거나 연산군처럼 정치 보복을 일삼는 폭군으로 일탈하고 말았을 정조의 삶, 그런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버렸다. 14 15 이렇게 소수파로 왕위에 앉았기 때문에 초반 3년 동안 거의 일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문신 중에서 지지세력을 규합을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게 됩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문신들을 배출하고, 왕의 정예부대인 장용영을 통해 무신들은 키웁니다. 문무에서 모두 왕의 뜻을 이해하고 힘을 모을 세력 을 구축하는 것이 정조의 초반부 중요한 과제였고, 그것을 해냅니다.



또 조선은 유교 지식에 통달해 있지 않으면 대부분 신하며, 재야지식인들이 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세종을 롤 모델로 삼았는데, 세종 의 집현전처럼 규장각을 설치해 문신들의 그룹을 만들어 계속 가르치고, 토론하며 왕의 권위를 드러내 보입니다. 그리고 일을 잘 할 수 있는 인재를 뽑아 교육하고 연구하며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게 규장각의 세 가지 목적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교수님이 집필하신 『정조평전』에 ‘오늘 밤을 새워 끝장 토론을 한다.’는 내용 은 마치 조선판 썰전이 연상됩니다. 정조는 말을 잘했나요? 일화를 듣고 싶습니다.



우선 저도 무릎을 '탁' 친 적이 있어요. 왕이 오후 경연인 ‘석강(夕講)’을 하면 보 통 한두 시간 지나 저녁을 먹고 휴식하거나 밀린 업무를 보기도 하는데, 정조 는 또 공부합니다. 사실 왕은 편하게 앉지만 신하들은 부복이라고 엎드려 있거든요. 더해서 정조가 “누워서 책보는 건 안 좋은 버릇이다. 바른 자세에서 바른 정신이 나온다.” 이러니 신하들은 자세도 흐트러트릴 수 없죠. 그렇게 아 홉 시가 되면 다과를 내오라 하고 다시 공부하니 한 신하가 “또 어디까지 하려 고 하시냐.” 묻죠. 이때 정조가 “과인은 오늘 밤을 새우려 하노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조가 아끼는 제자이자 신하인 정약용도 비판했죠. “인재를 뽑았으면 일을 줘야지, 계속 숙제를 주고 생도같이 자꾸 꾸짖고 이런 것은 인재를 대 하는 태도가 아니다.”라고. 또 『정조실록』이나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나오는 그의 학문적 세계를 보면 생각이 깊고, 워낙 박식합니다. 그중 정조가 『논어』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논하며 그 의미를 묻자, 신하 이유경이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배우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모범적인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정조가 “그렇지 않다. 초학자들은 그렇게 보는 경우가 많은데 온고지신의 깊은 뜻은 다른 데에 있다.”라고 하니, 이유경이 “초학자라뇨. 과거 수석 합격하고 공부 깨나 했는데, 대체 전하의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박합니다.



이에 정조가 “‘온고’의 고는 옛 고가 아닌 연고, 까닭고자며 이것은 단지 옛날 책이 아닌 나와 연고가 있는, 내가 읽고 영향을 받은 책, 나에게 의미 있는 책 을 의미한다.” 하며, ‘지신’도 “지(지식, 지혜)가 새로워진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대개 읽었던 책이나 글을 다시 익히면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것을 더욱 잘 알게 된다.”라고 말하며, “언제까지 계속 새것을 볼 거냐. 그동안 배운 것, 읽은 책, 경험한 것을 곰곰이 읽고 되돌아보면 내 안목이 높아 져서 지가 새로워지니 어떤 것을 봐도 주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데, 계속 새 것만 공부하면 평생 지식의 종이 된다.”라고 신하들을 감탄시킵니다.



이렇게 정조가 신하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생각을 바꾸게 하며, 안목을 새롭게 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벌서는 것 같으면서도 배울 게 있으니까 따라가게 된 거죠.



 



정조가 잠도 안 자고 책을 읽을 만큼 독서광이라던데, 어떤 장르에 관심 있었 으며, 책을 집필하기도 했나요?



정조에게 큰 영향을 준 책으로 두 개를 뽑을 수 있는데, 하나가 ‘사서삼경’에서 『서경』입니다. 이 책에서 바로 정조의 탕평 기원이 나오고 실제 그걸로 과거시 험에 출제도 합니다. 서경에서 황극이 북극성을 의미하는데 북극성이 자리를 잡으니까 뭇 별들이 질서 있게 돌아간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왕이 자리를 잡아 야 신하들이 싸우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잡는다는 정조의 메타포를 보여줍니다.



당시 당파의 지도자가 우선시되고, 국가의 이익은 나중에 당파의 이익이 먼저 인 그런 것들을 바꾸기 위해서 끌어오는 책이 『서경』입니다. 또 하나는 주희의 편지 중에서 요긴한 내용 100편을 뽑은 『주서백선』입니다. 이 부분은 노론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조가 일부러 주자에 대해서 강조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최근에 다시 보니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보 통 주자의 책은 예법, 주자가례를 강조하며 왕에게 간언하거나 비판하는 내용 이 많은데, 주자의 시는 감성적으로 자기절제, 수기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까 정조는 이미 그걸 꿰뚫고 노론이 강조하는 주자를 바탕으로 하되 시를 통해 너희들 함부로 아는 체하지 말고 절제하며 마음을 닦으라고 말합니다.



또 정조는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 집필도 엄청납니다. 세손 시절에 지은 시만 342편이 될 정도로 풍부한 감수성을 타고났으며, 편찬한 책들에 대한 설명을 담은 책 『군서표기』를 보면 정조가 편찬한 책이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해 왕의 국정 일기인 『일성록』, 정조의 어록집 『일득록』, 재판에 관한 책 『심리록』, 노무사에 관한 책, 인문학에 관한 책 등 분야별로 책 이 있는데, 정조는 89종류에 걸쳐 2,500권의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또 편찬 하라고 지시한 책이 4,000여 권이나 됩니다. 그중 이순신에 관한 『이충무공 전서』도 있고, 『난중일기』도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는 썼지만, 그해의 일기를 모아서 ‘정유일기’ 이런식으로 연도만 붙여놨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이충무공의 상소, 장계 등을 다 모아 그에 대한 전서를 컬렉션 하고, 전란 중에 쓴 일기를 모아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난중일기』입니다. 책에 관해서는 최고 의 군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소한 만남



 



세종과 정조를 둘 다 연구하셨는데, 학자로서 과거에 같이 일한다면 어떤 왕 을 선택할 것이며,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둘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말씀 해 주세요.



저는 태종을 택할 것 같아요(웃음). 요즘 『태종평전』을 쓰고 있는데 ‘이런 지도자가 있다면 신나게 일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태종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신하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려주고 따라오면 지지하며 인센티브 도 주고, 안 따라오면 좀 혼내는 사람이죠. 사실 세종 때 인재의 70%를 태종이 키웠습니다.



세종의 집현전 학사를 할 것이냐? 정조의 규장각 각신을 할 것이냐? 묻는 다면,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조는 신하들을 앞에서 끄는 사람이고, 세종은 뒤에서 미는 사람입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한테 좀 기를 북돋아 주는, 칭찬하고 다독이면서 믿고 맡기며 큰 욕도 안 하는 사람이라면, 정조는 신하들을 끌면서 안 따라오면 대놓고 면박을 주기도 하고, 규장각에서 가르치며, 문체반정처럼 꾸짖기도 합니다. 둘 다 워낙 학식이 깊고, 토론의 달인인데, 세종은 상대의 말을 경청하며 오랜 시간이 걸려도 설복시키는 거북이형이라면, 정조는 밤새 끝장토론을 즐기는 청산유수의 능변가로 빠른 판단의 토끼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각각 그 시대에 맞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정조가 강하게 끌지 않았더라면 노론이 그렇게까지 신해통공 한다든가 수원화성을 짓는다든가 이런 것들을 양보하고 지지했을 것인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둘 다 같이 일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웃음).



 



2019년도에 수원에서 정조와 화성에 대해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하신 것으로 압니다. 정조 연구에 있어 수원은 매우 중요한데 어떤 인연이 있을까요?



수원과의 인연은 많습니다. 그중 정조를 수원의 아이콘으로 설정하고 맨 처음 『정조실록』을 시리즈로 강연했습니다. 수원 시민들한테 실록의 중요한 부분 을 뽑아서 6회 정도 강의하면서 정조를 강의할 수 있는 분을 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신대 김준혁 교수, 무예 관련 김영호 소장 등 정조 관련 다양한 분들도 강의하셨어요. 한번은 ‘화성에서 꿈꾸다 뮤지컬’을 시연할 때 보니 특별한 상징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 정조 하면 달이 핵심이니 뮤지컬에서 달을 상징으로 해보는 건 어떨지 제안했었습니다. 나중에 달이 진짜로 중심이 되었 고, 포스터도 찌그러진 달을 상징으로 들어갔더라고요.



 



앞으로 정조 연구라든지, 정조 관련 집필 등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정치가 정조』라고 제가 처음에 쓴 책인데, 그 내용은 정치가로서의 정조를 연 구하며 비판적으로 보며 정조가 잘못한 점을 지적한 책입니다. 그다음에 『정조평전』을 썼는데, 되게 아카데믹한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정조를 학술적으로 접근한 책입니다. 한번은 정조와 세종의 리더십을 교본으로 배울 점과 반면교사 삼을 점을 뽑아서 대중서를 집필해 보려고 합니다. 또 11월 13~14일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배경으로 한 AR증강현실 연동 보드게임board game, ‘로 스토리:왕의 길’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청소년과 부모, 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조선 22대왕 정조와 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을 배우며, 보드게임도 즐기는 프로그램입니다.



 



-박현모 PROFILE-




  • 박현모(朴賢謀) 정치학 박사

  • 한국형리더십개발원 원장 /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  



1999년 서울대학교에서 ‘정조(正祖)의 정치사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1년부터 14 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조와 세종, 정도전과 최명길 등 왕과 재상의 리더십을 연구 했다. 2013년부터는 미국의 조지메이슨대학교, 일본의 ‘교토포럼’ 등에서 외국인을 대상으 로 ‘한국형리더십’을 강의하는 한편, 시민강좌 ‘실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2021년 6월 기 준 3,600여 명 수료). 현재 여주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및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으로 재직하며 대학교양 필수과목인 ‘세종리더십’을 대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세종처럼』, 『세종의 적솔력』, 『정조평전』, 『정조 사후 63년』 등이 있고, 『몸의 정치』 와 『휴머니즘과 폭력』을 우리말로 옮겼다. 「경국대전의 정치학」, 「정약용의 군주론 : 정조와 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왕의 동선과 정치재량권의 관계에 대한 연구: 정조와 순조」 등 80 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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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님2023-11-17 17: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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