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호 [칼럼]수원의 유래와 그 역사를 재조명하다

 












[공간 탐색]



 

수원의 유래와 그 역사를 재조명하다



고문서 지명 연구를 통해 본 남다른 수원

수원이란 지명의 유래는 본래 내륙이 아닌 바닷가 갯마을에서 비롯되었다. 2천여 년 전 현 화성시의 서쪽은 대부분 바다였으리라 짐작된다. 화성과 수원은 그 지형이 낮은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래 바닷물로 출렁거렸을 이 지역에 차츰 물이 빠져나가면서 작은 섬들은 산으로, 그리고 깊은 곳은 지금처럼 호수나 웅덩이로 변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 즈음 온통 물나라(水國)로 보였을 포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마을이 점점 커져서 오늘의 ‘수원’이란 지명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료 수원지명총람, 수원문화원 정리 편집실 사진 수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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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라에서 시작된 수원(水原)의 어원



흔히 수원을 말할 때 그 시발지로서 삼한 시대의 모수국(牟水國)을 떠올리곤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상(上)에 나오 는 마한 50여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 옳다면 모수(牟水)는 화성군 중에서도 바다에 연한 남양읍이나 송산면 아니면 서신면 쯤이 되리라 추정 할 수 있다. 모수국(牟水國)의 정확한 고유어 발음은 재구할 수 없으나 대체 로 물이 많은 곳, 즉 ‘물나라’란 뜻으로 쓰인 것 같다. 모수국(牟水國)의 국(國) 은 지금처럼 국가 개념의 나라가 아니라 부족 국가 시대에 한 부족이 모여 살던 집단 마을을 지칭한 것이다



수원은 고려시대 편찬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5세기 말엽 고구려가 점 령하고 있던 시절부터 신라 통일까지 매홀(買忽)이라 불렀는데 통일신라 경 덕왕 대(757년)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고 다시 고려 때는 수주 (水州)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여기서 성(城)이나 군(郡) 또는 홀(忽) 과 주(州)는 행정 구분에 따른 지명의 접미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명의 핵 심인 ‘수(水)’와 ‘매(買)’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買)는 발음상 물(水)과 관련 된 어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는 고유문자가 없던 시 절,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고유명사를 표기한 차자표기법이다. 한편 매홀(買 忽)의 忽은 ‘홀’로 읽히는 한자지만 표기 당시에는 ‘골’로 읽혔으리라 짐작된 다. 따라서 매홀(買忽)은 당시 ‘(매)골’ 또는 ‘미골’로 발음되었으리라 추정하 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에는 마한의 54소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었다. 이후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 서 몰아낸 후 매홀군(買忽郡)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 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고려시대 태조 때인 940년에 수주군(水州郡)으로 개 칭했다. 조선 1413년(태종 13년),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개편되어, 현재 의 수원이란 명칭이 확립되었다. 조선 후기 수원은 정조(正祖)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華山/花 山)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 작했다. 원래 있던 수원부 치소와 시가지를 현재의 수원화성으로 옮겨버리 고, 그 자리에 현륭원을 조성한 것이다.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송산 동 일대) 지역이 바로 옛 수원의 중심지였다.


 

므리水의 고장 - 모수국牟水國

모수국의 정확한 고유어 발음은 재구할 수 없으나 대체로 물이 많은 곳, 곧 ‘물나라’란 뜻으로 쓰인 것 같다. 해석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지만 쉽게 말하자면 부족 국가 시대에 한 부족이 모여 살던 집단 마을을 지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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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함께 성장한 수원시의 변화



현륭원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시 묵 을 화성행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수 원에도 배치시키고, 상업을 발전시켰다. 수원 역시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 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종2품을 두던 유수부였지만, 수원유수는 정2품으로 한성부판윤과 동급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 이후, 정조가 수원에 베풀던 특권 역시 폐지되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3부제 시행으로 인해 인천부 수원군으로 강등되었다. 일제강점기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현재의 수원 생활권이 확정되었다. 남쪽 의 진위군은 평택시에 내주고, 남양군의 육지 지역[7]과 안산군 일부, 광주군 일부가 편입되었다. 현재의 의왕시와 안산시 서남부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 이다. 이 시기에 옛 수원군과 남양군 시절에 면들의 통폐합이 이루어져, 남부 면·북부면이 수원면으로, 태촌면·장주면이 태장면으로, 안녕면·용복면이 안 용면으로, 일용면·형석면이 일형면으로, 음덕리면·둔지곶면·화척지면이 음 덕면(해방 이후 남양면으로 개칭, 현 화성시 남양읍) 등으로 통합되었다. 이 중 현재의 수원시 영역은 1914년 당시 수원면(팔달구 매산동, 매교동, 행궁동 일대), 일형면(장안구 전역 및 권선구 구운동, 서둔동, 팔달구 고등동, 화서동 일대), 안용면 일부(권선구 서남부), 태장면 일부(권선구 권선동, 팔달구 동부 및 영통구 일대) 등의 영역에 해당된다. 당시 화성행궁 내의 낙남헌을 수원 군청으로 사용했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고, 1936년 일형 면, 안용면, 태장면의 각 일부를 수원읍에 편입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 바로 다음날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시’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수원시로 승격된 수원읍 이외 지역은 ‘화 성군’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1963년 화성군 태장면, 안용면, 일왕면의 각 일 부를 편입하여 시역(市域)이 대폭 확장되었다. 1967년 서울특별시에 있던 경 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됐으며, 1970년 북수동 후생병원 자리에 있던 화성 군청이 오산읍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하리를, 1987 년에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 호매실리(현 금호동 지역)를 편입하면서 시역을 계속 넓혀 나갔다. 1988년 구(區)제가 실시되면서 장안구와 권선구로 분구 되었고, 1993년 장안구와 권선구의 일부를 팔달구로 분구했다. 1995년 화성 군 반월면 입북리, 당수리, 태안읍 영통리, 신리, 망포리 및 용인군 기흥읍 영 덕리 일부를 편입하여 현재의 수원시 경계가 확정됐다. 그리고 2003년 팔 달구 일부를 영통구로 분구했다. 장안구라는 이름은 화성의 북쪽 대문인 장 안문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팔달구는 수원시 중심 지역에 있는 구이 며, 팔달산과 화성 남쪽 문인 팔달문에서 따온 것이다. 권선구는 수원시 서 남쪽 지역에 있는 구다. 권선구라는 이름은 고려 말 한림학사이고 선생이 벼 슬을 내놓고 이곳에 살면서 백성들에게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권했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통구는 수원시 동부 쪽에 있으며, 모습이 염통처럼 생 겼다고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 예부터 신령님 같은 분이 나타났었고, 신령스러운 보물도 있었다고 전해져서 ‘신령스러운 기운이 흐르는 동네’라 는 뜻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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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내가 있는 마을부터 수원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



수원의 지명은 대부분 지역의 특징과 관련 있거나 물과 연계된 이름, 또는 수원화성과 연관된 이름이 많다. 그중 율천동이란 율전동과 천천동을 합한 동네다. 먼저 율전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옛날 이 동네는 밤나무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밤밭이라고 불렸고 지금의 이름인 율전동은 바 로 이 밤밭을 한자로 쓴 것이다. 천천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옛날부 터 이 동네에는 큰 샘물이 있어서 큰 내를 이루어 서호천으로 흘러들어 갔 다. 그래서 샘내 마을 또는 이를 한자로 표현한 천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 었다. 즉 천천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샘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자동은 정자1동과 정자2동으로 나누어져 있는 동네다. 정자동이라 는 동네 이름은 이 동네에는 영화정 등의 정자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다. 따라서 정자동이라는 이름은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화서동은 화성의 서문을 화서문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화서문 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화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화서1동과 화 서2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연무동은 법정동으로 연무동, 상광교동, 하광교 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동네에는 연무대가 있다. 이곳은 옛날 군사 훈련 과 무술 연마를 하던 곳으로 동네 이름도 연무동이라 하게 되었다. 우만동은 우만1동과 우만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네인데, 옛날 이 동네에 최씨와 임 씨 등이 소를 많이 키우며 살았기 때문에 우만이 또는 소만이라 부르던 것에 서 유래했다. 지동의 동네에는 옛날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인 ‘지(池)’ 자를 써서 ‘지곡’이라 불렀다. 지금은 지동이라 부르는데, 이는 지곡이라는 옛날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지동이라는 동네 이 름은 연못이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교동 안에는 매교동과 교동 2개 동의 법정동을 두고 있다. 매교동에는 조선 시대 정조 대왕이 행차하실 때 지나던 다리였던 매교가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매교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매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매교라는 다리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교동은 매교동에 속한 법정동이 있다. 이 동네에는 향교가 있다. 그래서 향교 가 있는 마을 또는 향교가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교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다. 북수동은 옛날부터 수원천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숫골이라 했던 사실에 서 유래되었다. 이 동네에는 화홍문이 있다. 그런데 이 화홍문을 북수문이라 고도 부른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북수문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북수동이라 고 부른다. 장안동이란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부르는데, 이곳도 장안 문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장안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풍동은 옛날부터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가 이 동네에 있었다. 그래서 신풍루가 있는 동네 라고 해서 신풍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수원은 짐작하건데 물과 가까웠을 지역에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 들 며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성이 지어지면서 성곽 주변으로 사람 들이 모여 시장이 형성되고 상권이 발달되면서 마을들이 점점 커져서 오늘 의 ‘수원’이란 지명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어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조선시대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600년 이상의 역사를 그 이름에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수원 곳곳의 명소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그 이름에 걸맞게 물 좋은 수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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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님2023-09-04 11:29:58

    수원에 이사 온지 어느덧 10년입니다. 이제서야 수원 여러 동들의 유래에 대해서 알게되네요. 훌륭한 웹싸이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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