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호 [칼럼] 필기도구의 역사: 시간과 ‘나’

 










[칼럼]



 

필기도구의 역사: 시간과 ‘나’



미닝아웃Meaning out: 의미, 신념을 뜻하는 ‘미닝Meaning’과 ‘벽장 속에서 나오다’라는 뜻의 ‘커밍아웃coming out’이 결합된 단어. 남들에게 밝히기 힘들어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던 자기만의 의미나 취향 또는 정치적ㆍ사회적 신념 등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표출하려는 현상. 최근에는 소비자 운동의 일종으로 간주되면서, 정치적ㆍ사회적 신념과 같은 자기만의 의미를 소비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하기도 함 출처 『시사상식사전』



글 김남석 부경대 교수, 문학/영화 평론가 일러스트 청운












늘 새로운 필기도구를 향하여

 

외부에서 SNSSocial Network Service나 이와 관련한 라이프스타일life style에 대한 의견을 물 어올 때마다, ‘필기도구의 역사’를 강변하던 한 스승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분 은 자신이 일생동안 경험했던 필기도구의 변천(사)을 ‘우리들―학생들’에게 여러 차례 말하곤 했다. 그가 말하던 요지를 간추리면, 자신이 일생을 거쳐 새로운 필기도구를 익히는 데에 보내야 했던 시간과 그 시간이 실제로는 무용했다는 의견으로 압축 될 수 있다. 그의 생각에 비추어 보면, ‘우리―현대인들’은 글을 쓰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새로운 도구를 만나야 했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글쓰기에 적응하는 시간을 적지 않게 소모해야 했다는 것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라) 시절 침을 발라가며 꼭꼭 눌러써야 했던 ‘모나미 연필’에서 시작하여 눈이 휘둥그레졌던 ‘샤프’, 적응이 쉽지 않았던 ‘볼펜’, 신기했던 ‘타이프라이터’, 그 다음 단계로서 ‘컴퓨터’ 등. 다들 알지 모르겠지만, 컴퓨터에서 한글의 버전 업은 그야말로 눈부셨고, 지금은 두 자리 수 이상의 버전을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 일일이 적응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실로 피곤한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나의 경험을 조금 첨부하자면, 나는 어려서 붓글씨를 쓰며 천자문을 배워야 했고, 타이프라이터 다음 단계에서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기도 했다. 볼펜에는 아직도 적응 을 못하고 있으며, 그때나 저때나 어느 필기도구에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세월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휴대전화기를 거의 새로운 차원의 필기도구로 격상시켜 사용하고 있다. 필기도구의 개념도 확장되어 이제는 특정한 공간에 한정된 사람들이 읽는 글쓰기가 아니라, 팔로워follower를 수 십 만 명 거느린―그야말로 언론 수준의 글쓰기를 시행하는―사람까지 등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신문 독자의 수를 능가할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글쓰기의 새로운 양태는 1인 1언론 시대를 열고 있다는 표현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이다










글쓰기와 인간의 삶

 

하지만 무섭게 달라지는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도 묻고 싶은 것은 거의 달라지지 않고 있다. 과연 이러한 눈부신 글쓰기가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더 정 확하게 말하면, 이러한 글쓰기가 우리의 삶을 안락하고 평온하게 만들고 있는가. 더 비판적으로 말하면, 과연 이러한 글쓰기가 과연 필요한가라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알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나의 사연’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 내면에 본연적으로 잠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글쓰기는 인간 욕망의 실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글쓰기의 바다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가 필요로 하는 많은 정보들을, 각자의 다른 ‘ -개인’들이 만들어―자발적으로 작성해―놓은 글들 속에서 찾(아내)곤 한다. 떠난다면 어디로 가야할지, 하룻밤을 묵어야한다면 어디에서 자야 할지, 어디에서 먹어야 할지,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면 좋고, 어떠한 영화를 보는 것이 안전하고, 어떤 레저를 개발할 수 있을지. 묻고 또 묻는다. 이른바 검색은 마치 자신이 모르는 신세계를 탐험하는 인상을 주고, 그래서 삶의 광대한 차원을 열어주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묻고 또 묻고, 때로는 쓰고 묻고, 계속해서 묻고 검색하는 과정에서 남는 이 허탈함은 과연 일시적인 것일까. 그렇게 물어서 얻은 것이, 실제로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현실과 그 과정에서 교묘하게 쌓이는 이 실망과 배신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찾아간 ‘맛집’이 진짜 ‘맛집’이 아니었다던가, 교묘한 상술에 ‘억지 춘향 격’으로 붙잡힌 숙소에서 불쾌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던가, 나에게 맞지 않은 레저를 위해 엄청난 금액을 써야 했다던가 등의 극단적인 피해 사례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검색과 서핑으로 인해 우리는 정작 우리 자신의 생각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때가 적지 않다.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이 실상 우리 내부에 있었는데, 화려하게 치장된 ‘나’들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린 경험도 드물지 않다.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측정하기보다는 타인의 욕망과 언술에 자신을 맞추고 있을 때가 의외로 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 속에 과연 ‘나’는 얼마나 들어 있었을까. 아니, 선택한 사람이 과연‘나’이기는 했던 것일까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의 쌍곡선

 

르네 지라르는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직접, 그리고 스스로 생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자신이 목표로 삼은 무엇을 얻는 과정(그것이 애인이든, 집이든, 권리이든, 심지어는 인생의 목표이든 간에)에서,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복사하고 전이하고 소유함으로써 이러한 욕망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라고 단정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적지 않은 의문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르네 지라르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남’, 즉 ‘나 아닌 다른 나(들)’의 의견으로 자신을 채우려는 속성이 있다는 정도의 합의는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SNS는 이러한 ‘나’들의 속성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의견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거꾸로 수많은 ‘나’들을 의식하고 ‘그(타인)’로 떨어져 존재해야 각각의 ‘나’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비단 SNS의 폐단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여러 현자와 석학들이 지적한 대로, 실재 세상에 대한 대항체 혹은 보완책으로서 사이버(가상) 세계에 대한 경도는 이미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 실재 세상에서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사이버 공간 속에서 이루려는 욕망은 가뜩이나 복잡한 ‘나’를 더욱 복잡하게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기까지 했다. 이러한 위험에 SNS는 분명 한몫 거들고 있다.










시간이 쌓이는 곳에, ‘나’도 함께 쌓인다.

 

현대인에게 SNS는 새로운 필기도구이다. 조선시대 문장가가 먹을 갈아 한자 한자 글을 쓰며 상소문을 작성하고, 그 상소문으로 세상에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명한 점과 기본적으로는 하등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의 젊은이들은 때로는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SNS를 통해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고 또 열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적극적인 글쓰기로 긍정하기도 한다. 미닝 아웃의 분화된 의미 속에는 이러한 글쓰기도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글쓰기 방식에는 그만큼의 속도와 시간차도 내장되기 마련이다. 먹을 갈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며, 함부로 고쳐 쓰기 곤란한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쓴 글이 허투루 쓰여 질 수 없으며, 또한 그 내용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투여 된 시간에 비례하지 않을 수 없다. SNS는 이러한 시간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도구이다. 글쓰기에 누적된 시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시간을 줄이는 데에 이 필기도구의 장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자신이 쓴 글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른 시간 내에 읽는 것에 근본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글(정보)들은 시간차를 무시하고 이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고, 또 그만큼의 속도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이버 속 공간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가능하겠지만, 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빨리 그리고 더 영향력 있게 자신의 글을 읽히도록 하는 것에 있으므로, 하나의 논점에 대해 투여될 시간이 줄어드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적지 않은 필기도구를 연마해왔다. 붓→연필→샤프→볼펜→타이프라이터→전통타자기→워드프로세서(버전 업 진행 중)→최신 SNS까지. 변화의 이유는 더 편리하거나, 더 빠르거나, 혹은 더 자신을 영향력있게 드러내는 도구가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기도구의 변천에 의해 자신을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고 안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서서, 시간을 들여서 다시 물어보자. 반드시 시간을 투자해서 해야만 하는 질문이다. 자신(의 의견)을 더 빠르게 드러내고, 자신(의 모습)을 이 세상에 더 영향력 있게 노출한다고 해서, 과연 ‘내’가 변화하거나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 보다 온전한 ‘나’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일까. 사이버 세상에서 SNS를 빌려 자신을 치장하고 속 빈 강정처럼 외면적 화려함만을 앞세우는 사례가 늘어날수록 이러한 질문은 더욱 집요해지고 또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 속의 ‘나’가 정말 ‘나’일까. 내 글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빨리 읽도록 만드는 일이, 과연 ‘나’를 ‘나’답게 만드는 최선일까(반드시 시간을 들여 서만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이다). SNS는 한 가지 공평함을 가지고 있다.

그 속도만큼, 글 속의 나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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