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호 [담장넘어 2] 전쟁의 아픔을 축제로 승화하다
영국 에든버러 거리
전쟁의 아픔을 축제로 승화하다
글 이형복 예술창작팀장
지난 8월 영국 에든버러의 하늘은 ‘화창’ 그 자체였다. 올 여름 찌는 듯한 더위를 뒤로하고 찾은 영국. 그러나 청명한 우리나라 가을 날씨와 같은 영국에 도착한 후 더위는 사라지고 밤기운은 서늘함 마저 느껴졌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지만 해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에도 월평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궂은 영국 날씨를 걱정하며 찾은 에든버러 축제 기간 동안 맑은 하늘과 더불어 세계 유수 축제 중 하나인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호기심과 설렘이었다. 에든버러 성(城)을 바라보며 ‘로열 마일거리’를 활기차게 활보하는 시민과 관광객들. 오래된 건축물에서 풍기는 푸릇한 이끼 냄새. 문화 선진국으로 불리는 도시의 당당함. 영국연방이지만 독자적인 문화를 간직한 스코틀랜드의 주요도시 에든버러의 첫 느낌이었다.
에든버러 축제에 빠지다
에든버러 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유럽인들에게 가해진 전쟁의 상흔을 치유한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이래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문화예술 축제로 자리 잡았다.
당시 영국 정부와 에든버러 시(市)의 후원을 받아 글라인드번(Glyndebourne) 오페라단 행정관이었던 루돌프 빙(Rudolf Bing)과 몇몇이 이 축제를 기획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에든버러 축제는 오페라 · 클래식 음악 · 연극 · 춤 · 비주얼 아트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러 나라의 공연 팀들을 초청하여 세계 최대의 공연 축제로 성장하였다.
매년 8월을 기점으로 한 달 남짓 진행되는 데, 공연 테마에 따라 100여 개의 공연이 무대에 올라간다. 공연은 더 허브(에든버러 축제센터)를 비롯하여 킹즈 극장 · 어셔홀 · 퀸즈홀 · 에든버러 플레이하우스 · 로스 극장 등 9곳에서 이루어진다.에든버러 축제의 백미는 군악대 연주(Military Tattoo)다. 에든버러 성 앞에서 펼쳐지는 이 화려한 공연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악기인 백파이프와 드럼을 둘러맨 군악대를 선두로 세계 각 나라의 군악대들이 음악 퍼레이드를 벌인다. 축제기간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밤 열리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매년 에든버러를 방문하는 사람이있을 정도이다. 이 공연은 1950년 작은 규모의 부대행사로 시작되어 지금은 2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관람하는 주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좌) 에든버러 킹스 극장 / (우)에든버리 축제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청소년으로 구성된 오토바이 곡예단과 인도 · 뉴질랜드 · 방글라데시 · 미국 등의 국악대가 참여했다. 절도 있고 짜임새 있는 행진과 집총의식 그리고 각 나라의 독특한 복장이 관람객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에든버러 성 앞에 설치한 대형 공연장은 규모면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축구장 크기의 공연장 주변에 높다란 계단식 의자를 설치했는데, 세계문화유산인 이곳에 이처럼 현대적 구조물을 조성한 것이 이채롭다. 문화재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 활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었고, 더불어 성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가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미처 티켓을 구매하지 못한 관광객은 공연장 입구에 터번을 쓴 암표상을 통해 웃돈을 주고 티켓을 구입할 수도 있다.
(좌측 상하) 에든버러 타투 / (우/상)에든버러 축제 기프트숍 / (우/하) 에든버러 축제 홍보물
또 다른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에든버러 국제 축제에서 공식적인 초청을 받지못한 무명의 공연단체들은 프린지란 이름으로 에든버러 곳곳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펼친다. 어쩌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여하튼 8월 에든버러에서 펼쳐지는 축제는 우선순위 보다는 다양함 속에 어루러지는 축제의 향연 그 자체이다.
굳이 무엇이 무엇이라고 구분 짓기 보다는 함께 어우러져 축제를 즐기고 참여하면 된다. ‘프린지(fringe)’의 뜻이 ‘주변’인 것처럼 프린지 페스티벌은 공식 초청공연으로 이루어지는 국제페스티벌과는 달리 자유 참가 형식의 공연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부대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는 해마다 수백 개의 공연 단체가 참가하여 수천 건이 넘는 공연을 진행하는 올해의 경우 3천여 공연이 열렸다고 한다. 공연 분야는 코미디극 · 음악 · 어린이극 · 뮤지컬 · 오페라 · 무용 · 신체극(무언극) · 전시 등 다양하다.
참가 단체들은 공연장(임시공연장, 야외공연장 등)을 잡는 것부터 공연 홍보까지 모든 것을자발적으로 추진한다. 이들은 에든버러 중심부인로열 마일에서 즉흥 거리공연을 펼치거나 홍보활동을 펼치면서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최대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자신들의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무대 의상을 입고 거리로 나와 약간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거나 전단을 돌리며 적극적인 홍보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조차 축제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러한 행위에서는 나의 멋진 공연을 당신이 꼭 봐야만 한다는 당위성마저 느껴졌다.
여기다 공연기간 동안 교회와 맥주집, 갤러리등은 공연장으로 탈바꿈한다. 오래된 건축물도 간단한 구조변경을 통해 소극장으로 변신한다.
익숙함이 던져주는 묵직한 울림일까. 공간의 재해석은 주행사장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축제 현장과 견주어 볼 때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축제의 도시 에든버러의 이모저모
스코틀랜드 인구는 잉글랜드의 10분의 1밖에 안되지만, 골프와 스카치위스키의 원조이자 민속악기인 백파이프와 타탄(tartan)으로 만들어진 전통의상 킬트 등 자신들만의 전통을 고유한 정체성으로 확립시킨 스코틀랜드인의 고집이 담겨있다. 그러한 자부심이 여러 축제 형태로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에든버러 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곳은 단연 에든버러 성이다. 바위산 위에 세워진 에든버러 성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중세 도시의 분위기로 가득하다. 애초 지어진 목적 자체가 군사 요새였기 때문에 궁전의 화려함보다 요새와 성이 갖는 견고하고 투박한 느낌이 인상적이다.성 안 대연회장에는 과거 스코틀랜드 왕의 대관식 때 사용되었던 ‘운명의 돌’(The Stone of Destiny)이 전시돼 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상 징인 ‘운명의 돌’은 700년 전 이웃나라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1세에게 빼앗겨,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서 분리된 이후인 지난 1996년에야았다.
이런한 역사를 배경으로 에든버러에서는 1년내내 공연이 펼쳐진다. 가히 축제의 도시답다. 가장 대표적인 축제로는 에든버러 국제 축제를 비롯해 에든버러 프린지 · 밀리터리 타투 · 드럼페스티벌 · 재즈페스티벌 & 블루스페스티벌 등 11개의 굵직굵직한 행사를 통해 연중 들썩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