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호 [특집3] 웃음 그 사소한 구원


[특집3]

웃음 그 사소한 구원



글 신현아 문화평론가



'병맛': 뜬금없는 세계를 냉소하기



만화와 ‘병맛’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있다.
만화는 문화를 반영하는 데 세상이 ‘병맛’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엉덩국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읽기는 ‘품’ 안이 아니라 ‘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핸드‘북’이 아니라 핸드‘폰’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신문기사든 통상적으로 만화라고 부르는 것이든 마찬가지다. 지하철 옆자리 사람을 방해할 필요도 없고, 침을 묻힐 필요도 없다. 침을 묻히면 오히려 읽기는 중지될지도 모른다. 건조하고 메마른 환경이 중요하다. 비록 방수가 된다고는 하지만, 배터리가 터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책에 음료를 쏟을 때, 그 책의 이미지나 글자를 볼 수 없도록 훼손될 수 있지만 핸드폰으로 열린 ‘텍스트’ 자체가 손실을 입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것은 읽기 관습의 변화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문화 텍스트의 서사적 구조 역시 기왕의 문화 양식 아래에서 성숙한 서사적 구조와 같은 방식으로 제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출판만화가 ‘칸’의 분할을 통한 연출을 기본으로 한다면, 웹툰은 손가락으로 칸의 분할에 운동성을 부여하면서,세로축의 ‘스크롤’을 연출의 조건으로 삼는다. 만화-‘책’에서‘웹’-툰으로 매체의 프레임이 변화하자 그 매체를 향유하는 독자와 그들이 공유하는 서사적 코드 역시 달라진다. 『점프』(일본 집영사에서 발행하는 만화잡지)로 대표되는 출판만화는 ‘우정 · 노력 · 승리’를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주인공의 성장서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웹툰이 우정과 노력을 통해 승리를 이루는 기-승-전-결의 ‘만화’와 구분되어 독자적인 서사와 웃음 코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은 ‘병맛’의 발명으로부터이다.
가령, 한 청년이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다가 버스에 탑승하면서 실수로 요금통에 지폐와 담배꽁초를 같이 넣어버리고, 이로 인해 버스 안에 불이 붙는다. 청년은 갑자기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라고 외치고 버스 기사도 이유없이 “오케이!” 라고 외치며 불타는 버스는 청와대로 돌진하여, 전원 사망으로 끝난다. (이말년, <이말년 씨리즈: 불타는 버스>)‘우정 · 노력 · 승리’나 ‘성장’은커녕 뜬금없이 불이 붙고, 뜬금없이 돌진해서, 아무 결과도 내지 않고 끝나버린다. 기-승-전-결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논리적 인과성이 붕괴되어 있는 ‘기-승-전-병’이라는 뜬금없고 맥락없는 서사에 대한 웃음이 바로 ‘*병맛’의 웃음코드이다. (*이는 ‘병신맛’을 줄인 일종의 혐오발화이기도 하다.)
또한 이 ‘기승전병’의 서사는 인터넷에서 빠르게 소모되는 유머코드를 끊임없이 패러디하고 재배치함으로써, “삶의 시간 상당부분을 웹에서 거주하는 소위 ‘헤비-유저들’을 명백하게 겨냥한다.”(김수환, 『웹툰에 나타난 세대의 감성구조』, 『탈경계인문학』, 2011.) 그리고 이는 ‘작가인 너나 독자인 나나 웹의 패러디를 향유하는 잉여’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즉 허탈한 ‘병맛’이 웹툰의 지배적인 웃음 코드로써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청년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게 하는 현실을 기-승-전-병으로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예측불가능성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청년 자신은 ‘병신’ 또는 ‘잉여’로 규정된다. 그러니 ‘병맛’의 웃음코드는 사실상 ‘병신’이라는 자학/자조와 허탈한 웃음을 섞은 ‘냉소’에가까운 것이다. (김수환, 앞의 글) 하여 ‘병맛’의 웃음은 그런 스스로에게 냉소하는 동시에 나만 그런 ‘병맛’의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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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왕>: 사소한 구원의 웃음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기승전병’이라해도 언제까지나 한발짝 뒤로 빠져 냉소하거나 자학하는 것만으로 버텨내기란 어렵다. 게다가 현실은 이제 ‘기승전병’을 넘어 ‘병병병병’이라는 항구적 뜬금없음의 상태가 되어, 어디까지가 ‘기, 승, 전’이고 어디부터가 ‘병맛’인지를 구분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더 이상 냉소조차 할 수 없을 때, ‘잉여’들은 이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는 것일까.
기안84의 <복학왕>은 그런 면에서 ‘병맛 이후’의 서사로 읽어봄직하다. <복학왕>의 전작인 <패션왕>은 10대의 생활을 ‘병맛 넘치는’ 리얼리티로 담아냈다. 주인공 ‘우기명’은 ‘패션의 왕이 될 남자’를 목표로 한다고 하지만 정작 패션왕을 뽑는 오디션에서는 야성을 드러내다 못해 진짜 늑대가 되어서 갑자기 숲으로 도망가 버리는 등 그야말로 ‘기승전병’의 서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복학왕>은 <패션왕>의 ‘병맛 넘치는’ 인물들이 20대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잉여’로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패션왕>의 ‘기승전병’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처구니없게 탈출하는 것이었다면, <복학왕>의 ‘잉여’들은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부대끼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적응해나가는 중이다. ‘교생실습’ 편에서 주인공 우기명은 교생실습을 간 고등학교에서 가정폭력으로 인해 가출한 학생과 소통하며 자신의 10대를 떠올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길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을 납득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자책하면서도 학생의 눈물을 마주보며 에피소드를 마친다. 여기에는 어떤 기승전결적 완결이나 성장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 ‘병병병병’인 현실을 ‘병맛’이라고 냉소하지 않는 ‘마주봄’이 있다.
하여 <복학왕>의 서사는 인터넷 유머코드의 끝없는 패러디에서 벗어나 다시 삶 위에 발을 딛게 된다. 여전히 현실은 보잘 것 없고 뜬금없음의 연속이지만 냉소하지 않고 마주보게 되는 와중에 사소하고 찰나적 구원의 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복학왕> ‘결혼식’ 편에서 우기명은 <패션왕>에 등장한 10대 시절 여자 친구인 박혜진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친구들의위치가 돌이킬 수 없게 변해버렸다는 것과 자신의 현실이 보잘 것 없음을 자조하는 우기명에게 박혜진은 “고마워. 잘 지내.” 라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그 순간 교복에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은 10대 시절로 돌아간 모습으로 조금 웃으면서, 우기명도 “너도 잘 지내.”라고 답한다. ‘병맛’이었던 날을 자조하거나 자학하지 않고 “고마워”라고 말하며 마주하는 그 찰나에 그들은 ‘잉여’나 ‘병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처럼 <복학왕>은 패배적 냉소 이후의 서사로 ‘우기명’의 성장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것은 이전의 ‘우정·노력·승리’라는 극복과 기승전결의 서사로 회귀하지 않는다. 하여 우기명은 무엇에도 승리하지 않지만 그러나 패배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해명하거나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나가기에, ‘병맛’으로 상징되는 20대의 냉소적 세대론과 다른 서사를 그려나가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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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웃음은 눈물 맛

그러나 자신을 ‘병신’이라고 냉소하는것에서 ‘마주봄’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실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여전히 현실은 내가 제대로 마주보기전에 갑자기 나를 덮치고 뭉개어버린다.
그럴 때 ‘냉소’는 그 마주보기조차 힘겨운 것을 간신히 버텨내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적 수단이기도 하다. 작가명도 작품명도 주인공의 이름도 모두 ‘단지’인 <단지>는 가부장적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에게 정신적·신체적으로 학대받고 차별당해온 30대 여성인 단지작가 자신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이면서 냉소를 넘어서기 위한 힘겨운 싸움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미 가족에게서 분가한 ‘단지’가 이제 학대의 기억으로부터도 독립하기 위해 다시 가족과 기억을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단지>의 첫 번째 이야기 속에서 단지는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밀고 훈계를 하는 오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난 또 거기서 병신같이 웃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엄마가 송곳으로 ‘단지’의 눈을 찔러버린다고 말한 날의 일기에는“오빠도 나보고 ‘병신’이라고 엄마도 나보고 ‘병신’이라고, 모두 없어져 버려라!” 라고 쓰여 있다. 이 ‘병신’이 ‘잉여’들의 ‘병맛’과 등치될 수는 없지만, 언제 어디서 자신을 뭉개버릴지 모르는 폭력이 도사린 현실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자신에 대한 서글픈 호명이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서글픈 웃음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현재의 ‘단지’가 이야기 내내 보여주는 얼굴이기도 하다. 무력하지만 붕괴되지 않기 위한 시도인 이 웃음은 TV에서 가정폭력 생존자 소년의 인터뷰를 보던 날, 그리고 큰 결심을 하고 엄마에게 심정을 털어놓았지만 소통에 실패하던 날 울음으로 터진다.
‘단지’는 1부를 맺으며 엄마와의 새로운 관계도, 남동생과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도 “아무 것도 못했어”라며, “해피엔딩을 바랬을 순수한 독자들 김빠졌겠네. 근데 내인생이란 게 영화나 드라마 같지 않더라고. 그럼 다큐냐? 아냐. 그것도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냐.” 라고 말한다. 그러나 단지가 서글픈 웃음으로밖에 견딜 수 없었던 현실을 조금씩 구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바로 그 지점이다.“내 결말이 이런 식이기 때문에, ‘화해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할 수 있어서 사실 다행이다.”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해피엔딩’이 오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사연과 접속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님’에서 ‘단지’의 의미를 엿보게 된다. 얼핏 만화의 내용과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단지’라는 단어가 작가이자 제목이자 주인공이었던 이유는 작가가 H.O.T의 히트곡 <캔디>를 듣는 모습에서 얼핏 드러난다.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이제껏 준비했던 많은 말을 뒤로한 채. 언제나 네 옆에 있을게. 다신 너 혼자 아냐. 너의 곁엔 내가 있잖아. 캔디.” 이 가사처럼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나라도, 그저 ‘단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솔직한 바람과 그렇게 누군가의 곁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단지’이기에 또 다른 ‘단지’들을 불러 모으는 연대의 자리가 된다.



또 다른 ‘웃음’



점점 더 폭력적이고 우연적이고 ‘뜬금없어’지는 현실 속에서 승리 아니면 패배, 생존 아니면 절멸이라는 선택지에서 매 번어느 쪽으로 내몰릴지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병맛나는’ 현실에서 내몰린 자신을 ‘병신’이라고 냉소했던 우리는 이제 다른 표정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 표정은 현실에서 부대끼는 당신과 내가 함께 이기지도 지지도 않으며 연대의 손을 잡고 마주 볼 때의 바로 그 웃음일 것이다.



신현아 월간 <바람의 연구자>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 (공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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