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 [책 나들이] 제국의 시선은 역시 제국의 시선이다!
제국의 시선은 역시 제국의 시선이다!
글 김희만 역사학자 · 문학박사
다양한 서가의 책 중에서 이 책의 제목인 ‘제국의 시선(Imperial Eyes)’은 잠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두껍게 몸매를 치장한 겉모습도 예사롭지 않았으며, 그 내용 또한 절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 말고도 ‘제국의 시선’이라는 책 제목은 다양한 형태로 여럿이 놓여 있었다. ‘박람회와 이문화 표상’이라는 부제로 놓여 있거나,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와 조선문제’도 부제로서는 흥미로운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제국의 시선’이라는 책 제목이 주는 상징성이 강한 탓일까. 어쨌든 어려운 내용이면서도 결코 마음 한 구석에서 떠나지 않는 여운을 간직한 채, 이번 책 나들이에는 ‘제국의 시선?여행기와 문화횡단-’이라는 책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 책은 여행기와 유럽의 확장을 다루는 한 강좌에서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유럽인의 우월성만을 크게 기리는 서사(敍事), 특히 유럽의 이데올로기들이 휘두른 역사의 영향력을 비판하기 위해서 마련하였다고 한다. 제국주의의 다양한 작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행되었으며, 제국주의가 구속한 지식과 상상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자,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제국주의의 구속에서 벗어난 빈 터를 창안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책의 시작이다.
특별히 이 책의 서론에서는 접촉지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존의 견해들을 비평하고 있다. 이 용어를 제시함으로써 이 책의 핵심 키워드 역할을 하며, 또한 문화횡단이라는 용어를 통해 책의 좌우를 누빈다. 이어서 1750년부터 1800년까지 과학, 지구적 차원의 의식, 내륙, 반정복의 서사화, 호혜성의 신비, 에로스와 노예제의 폐지 등 색다른 개념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1800년부터 1850년까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재발명과 관련하여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자본주의의 전위와 여성 사회 탐험가, 그리고 유럽을 재발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60년부터 2007년까지에는 제국의 문체론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다소 우리의 사유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주선된다.
이 책의 저자인 프랫은 크게 여성학, 언어학, 문학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 세 가지 기준은 개별적이라기보다 동시에 작용한다. 특히, 여행문학과 관련하여 그가 사용하는 ‘접촉지대(contact zone)’라는 용어는 18?19세기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여러 지역들이자, 유럽인 여행가들과 현지의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치는 장소들이다. 다시 말해, 접촉지대는 “지배와 복종, 식민주의와 노예제도 등과 같이 극도로 비대칭적인 관계 속에서, 또는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전 세계를 가로질러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과 같이 극도로 비대칭적인 관계가 초래한 결과 속에서, 이종 문화들이 만나고 부딪히고 서로 맞붙어 싸우는 사회적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접촉지대라는 술어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여행하는 사람(travelers)’과 ‘여행되는 사람(travelees)’ 사이의 관계를 서로 무관하고 분리된 상태로 다루는 대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해와 행위가 맞물린 관계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접촉지대에서의 담론은 중심(유럽)에서 주변(식민지)을 향해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중심과 주변이 서로의 담론에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순수하게 중심적이지도 않고 주변적이지도 않은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담론들이 구성된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용어라고 생각되지만, 과연 살아 있는 용어일까?
또한 이와 더불어 그러한 접촉지대의 현상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문화횡단(transculturation)’이라는 용어를 차용하고 있다. ‘문화횡단’이란 변경의 종속된 사람들이 지배적인 문화나 식민지 본국으로부터 전해지는 문화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개념이다. 즉, 접촉지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상대의 담론(특히 식민자의 담론)이 자신들에게 전달되는 현상을 차단할 수는 없지만, 상대의 문화와 담론 가운데 어떤 부분을 자신의 삶에 포함시킬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띠게 할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범위에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들어 보라하면, 아마도 다음에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의 과거 상황과 오버랩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존 마이어스는 아르헨티나 팜파스에서 이와 유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사람들의 습관은 정말로 추잡한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세수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옷을 빨아 입거나 수선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일단 옷을 입으면 천이 닳아 못 입게 될 때까지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계속 입고 있다.”
장황하게 비판을 늘어놓는 이야기는 물론 완벽한 위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일단 자본주의의 전위가 개입하도록 정당성을 마련해 주는 것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는 후진적이라는 평판이기 때문이다. 전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업은 라틴 아메리카를 방치되고 후진적인 상태로 재발명하자는 것이자 라틴 아메리카의 비자본주의적 풍경과 사회가 유럽인들이 갖고 들어온 합리적인 개발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처럼 암시화하는 것이다. 식민지의 담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문명화 사명의 표현법을 알게 될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 표현법을 구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바로 유럽인 자신을 위해서) ‘토착민’으로 만든다. 즉, 그들을 유럽인이 이미 도달한 어떤 존재가 되기에는 무능력해서 고통 받고 있는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들로 만들거나, 유럽인들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도록 기도(企圖)하는 방향으로 그 스스로 나아가기에는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로 만든다. 좀 장황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일제 강점기의 자화상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유럽제국주의 문화의 이식이 결국 일본 제국주의문화의 탄생이며, 그 또 다른 이식이 바로 조선 식민지문화였으니, 이를 어찌 눈여겨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참혹했던 과거의 잔상이 이 책의 한 부분에서 포착되고, 이를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제국의 시선은 가진 자의 향유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제국의 시선은 역시 제국의 시선’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역시 제국을 위한 제국의 시선인 것이다.
김희만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사의 이해』, 『화랑세기를 다시 본다』 등의 공저서와 「수여선의 개통과 사회변화」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최근 인터넷신문 뉴스피크에 ‘헌책방의 인문학’이라는 코너를 마련하여 격주로 글을 연재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