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 [인물포커스] 아름다운 몸의 언어, 캔버스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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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17년차에 접어든 수원 출신 작가 윤성희


[인물포커스] 미술작가 최세경

아름다운 몸의 언어, 캔버스에 담다



글 이형복 화성공연팀장 사진 김신



얼마 전 제주도 한라산을 처음 등정했다.
등산에 문외한인지라 산에 오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제주도 여행에서 산행을 결심한 것은 나름 개인적인 소원 내지 바람을 이루고자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겨울산은 만만치 않았고, 한라산의 정상을 탈환하지 못한 채 화산암으로 우뚝 솟은 정상 아래에서 그 위용만을 감상했다.
흰 사슴이 노닌다는 백록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 경외감은 만끽했으니,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불과한 산행은 비교적 성공적이라 자평한다.



인간사를 엿보는 작가 최세경



여느 산이 그렇듯 정상에 오르는 길을 다양하다. 필자가 오른 코스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영실코스. 아마 이른 봄철 진달래와 철쭉,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라 짐작했다. 제주도 여행길에 자주 마주친 한라산과 백록담에 오를 수 있다는 성판악 코스도 먼 발치에서 목도했다.
산의 정상을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그 모양을 달라진다. 어찌 풍경뿐이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에서 지속적이며 단말마적인 속세의 만남과 헤어짐, 또다른 상황의 연속이 ‘아 이것이 인생이구나’하는 감탄과 탄식을 절로 부르게 한다.
미술작가 최세경을 만난 것은 생면무지인 수원에 직장을 잡고 사회초년생으로 첫 발을 디딜 때다. 비교적 큰 키에 긴 생머리, 둥글둥글한 안경태가 인상적인 그. 순정만화에서 툭 틔어나왔을 것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그.무슨 작업을 할까. 직업정신이 발동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물었을 때 10여년 전 ‘그림 그린다’는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금도 떠오른다. ‘그림’. 그리다의 명사형인 그 말이 때론 모든 것을 대변한다. 아니면 조금은 성의 없는 느낌도 든다. 요즘처럼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융복합시대에 어쩌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예전에 하던 것을 지금도 하고 있어’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로잉에 삼라만상을 담다



여하튼 그림그리는 자가 화가(작가)이고 그 대상은 어제도 지금도, 미래도 계속될 것이니까. 수원 교동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은 비교적 넓었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나오는 ‘톱밥난로’를 연상시키는 난방기가 온기를 내뿜었지만, 공간 전체를 훈훈히 덥히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곳곳에 작가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작업실. 전시장에 나보란 듯이 서 있었을 작품과 수천 번의 손끝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드로잉 작품. 작가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장난감까지….
작가의 작업장을 훔쳐(?) 보는 재미는 관음증의 또다른 종류일 수 있지만 그를 잘 알아가는 과정이기에, 몇 줄의 글을 좀 더 알차게 쓰겠다는 필자의 욕심(?)이기에, 멈출 수 없는 호기심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했다.
작업장에서 완성과 미완성의 작품들을 마주하며 그리 편치 않은 감정이 다가왔다. 흔히 미술작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가.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취향도 현대적 감성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미적 취향이야 모두가 다르지만 말이다.
연필과 펜으로 원형을 그리며 표현한 드로잉은 누가 봐도 사람의 형체다. 이는 인체를 상징하는 길다란 팔과 다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감히 생략한 머리며, 지극히 과장된 손의 관절, ‘진격의 거인’에 나올듯한 뼈마디는 지상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연옥(煉獄)에서의 지리한 고통을 수반해야 하는 인간군상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러한 최세경의 작품세계에 대해 김성호 미술평론가는 “그녀의 인물들은 때로는 머리가 없고 때로는 팔다리가 여럿인 식으로 성징의 구별이나 몸의 구체성을 결여한 비현실적인 인간들이지만 이 허구적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여러 말을 하고 여러 감정을 함께 전해준다 (중략) 그녀의 주제의식은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의 정체성을 모색하기에 제격이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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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대화

드로잉은 미술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자 수단이다.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그 완성을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다. 그래서 그 원초적인 단계는 쉽게 잊혀진다. 때론 과감히 삭제하고 다시 시작한다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세경은 그 단계에서 형태를 탐구하고 관계회복에 이른다.
먼저 그가 다루는 인체에 그 해답이 있다. 인간은 태초부터 동려에 대한 탐구를 지속했다. 단순하지만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벽화나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에 담았고 문자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하나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작용했다. 오래전 인물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가 그랬고, 조각가 또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 인물과 함께 그려넣기도 했다. 사진의 발명 이후는 어떤가. 그 목적이 어떻든 사람의 모습이 매체를 달리하며 지금까지 표현되고 있다.
비교적 말수가 적은 작가의 성향이 반영된 작품은 구구절절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기쁘면 기쁜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그려진다. 곡선은 앞서 말한 것처럼 소통의 과정이다.
끊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이며, 단절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려는 애닮은 도전이자 시도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며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 이 과정에서 혹독히 자존심을 상하기도 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다. 흔히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받는다’고 한다.
어디까지일까. 마치 자유기술법처럼 손가는 대로 그려진 그의 인체 드로잉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가 추구하는 형태를 만들어낸다. 병든 나무의 두툼한 생채기처럼 괴기스럽게 확장시킨 발가락은 우울하고 불편한 시선을 감출 수 없다. 채색 없이 검은 톤의 드로잉도 한몫하는데 현란한 색채의 향연은 상상할 수도 없다.그런데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요즘 힘들지. 나도 힘들어 그런데 어떻해. 인생이 다 그래, 나를 봐, 너무 열심히 뛰어다녔더니 발이 엄청 부었어.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예 귀를 막아버렸어”



우울한 현대인에게 위로의 손을 뻗다



최세경의 작품은 그러 현대인의 초상이다. 비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당연하다거나 무조건 참으라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고통이라고 말해야 한다.
최 작가는 “드로잉을 할 때 산만함이 줄어들고 한 곳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손이 도드라지게 부각된 것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여서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말한다. 무엇을 할 때, 특히 행동에 옮길 때, 행동대장 역할이 바로 손이다. 때론 탐욕의 상징이기도, 때론 위로와 격려의 상징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인체의 특정 부위를 클로즈업 하는 행위는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암시다. 드라마틱한 상황을 사전에 알리는 매개체인 것이다. 우리는 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품고 산다.
불확실한 미래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그 긴장이 적절할 때 위기대처 능력도 십분 발휘될 수 있다.
그러나 삶이 그런가. 아무리 예측 가능하다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좌절과 실망의 고리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러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최세경의 아이콘처럼 자리잡은 원형의 드로잉 기법은 상대와의 지치지 않는 대화이자 자신만의 메시지 아닐까.
작가의 기초를 이루는 드로잉은 관람자와의 좀더 친숙한 대화를 위해 확장을 마다하지 않는다. 평면의 드로잉은 여러 재료에 투영된다. 인체 드로잉은 길다란 비닐에 담겨 마치 설치작품을 연상시키고, 알루미늄이나 원목에 옮겨져 조각품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얼마전까지 문화상회 다담 건물에 부조형식으로 설치됐던 작품은 서울 광화문의 ‘해머링맨’을 연상시키고, 건물 기둥 등 기존 건축물의 형태를 그대로 둔 채 인체를 덧입힌 작품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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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풍경

이처럼 공간의 특성을 살려 설치된 작품들은 독립적인 의지표현인 동시에 주변과 어우러지려는 화합이자 공생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 나름의 융통성을 담보로한 표현의 하나일 수도 있고, 그렇게 세상은 더불어 숲이 되야한다는 미약한 항변의 메시지 일 수도 있다. 언제나 해석과 선택의 관점은 관람자의 몫이다.
다만 멈추지지 않는 최세경의 드로잉 세계에 미약한 인체의 한계가 타인을 위한 향기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아프다고 말하고, 우울하다고 말하고, 포기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타인의 그런 감정의 기복에서 적절한 조력자가 된다면 세상은 좀더 따뜻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김성호 평론가의 작품평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기대 역시 유의미하다. 우울함과 유머스러함, 그로테스크와 건강함, 해체와 구축과 같은 ‘자유로운 예술적 충동’과 ‘구축된 그녀만의 관성’이 충돌하고 있는 미묘한 긴장을 언제나 그녀의 화면 안에서 함께 볼 것이며 그것이 앞으로도 발전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최세경 작가 프로필
개인전
2010 씨드갤러리초대전/씨드갤러리
2014 최세경-보이는것 보여주기展 /윈도우갤러리
기획전/단체전
2010 propagation 展 / siddhartha art gallery, Kathmandu in Nepal
오늘, 또다른 이날 / 수원미술전시관
2013 생태교통 수원2013 / 수원행궁동
2014 걸어온 10년, 걸어갈10년-비빔밥;뷔페 / 대안공간 눈
빈집프로젝트‘예술을 아십니까?’/ 매향동24-3
2015 82메모리즈1+1 / 수원미술전시관
MOA매홀국제환경미술제/수원, 오산, 형도
빈집프로젝트‘살짝비엔날레’ / 태장동국립종자원
VINZIP 해가서쪽에서 뜬다면 / 실험공간UZ
아티스트 콜라보展 / 복합문화공간 봄
현대미술의 오디세이展 / 울산문화예술회관
수원시립 아이파크미술관 개관초대전/수원시립 아이파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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