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문화재단
9호 [담장넘어] 터키 남서부 도시유적들 안탈리아 해안과 내륙 부르두르를 여행하다
사갈라소스 유적
안탈리아 해안과 내륙 부르두르를 여행하다
글·사진 이병학 한겨레 문화부 선임기자
지중해와 흑해 사이, 아나톨리아 반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고리 구실을 해온 곳이다. 고대부터 무수한 문명들이 명멸했던 지역이다. 수천 년 전 문명의 흔적은 무수한 대리석 돌기둥과 성벽, 무너진 건물터들로 남았다.다양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조각마다 인류 문명사의 세월이 아로새겨져 빛을 발하는 이곳, 바로 터키다. 고색창 연한 인류 문화유산 덕에 터키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터키 남서부 해안도시 안탈리아
안탈리아는 터키 남서부 해안에 자리 잡은 휴양지이자 여행 거점도시다. 지중해 해안을 따라 도시 유적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항구 쪽 칼레이치(성 안) 지역이 옛 도시의 도심이다. 안탈리아 동쪽 해안의 팜필리아 옛 도시 유적과 서남쪽 해안의 리키아 유적 및 자연경관들이 옛것을 좋아하는 여행자를 기다린다.고대 도시 유적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성 요소들이 있다. 왕들의 행사나 각종 공연·경기를 벌이던 원형극장, 시민들의 집회장소이자 시장이던 아고라, 그리고 도시로 들어갈 때 몸을 씻던 하맘(목욕시설), 생활공간인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죽음의 공간(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 등이다. 목욕탕인 하맘은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 등 전염병에 대비해 도시마다 갖추고 있던 시설이다.
묘지도 마찬가지다. 주검을 도시 안 지역에 석실을 만들어 매장하기도 했지만, 도시 밖의 바위절벽을 파내고 석실들을 만들어 공동묘지로 쓰기도 했다.
안탈리아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페르게·아스펜도스·시데 등 옛 도시 유적들은 모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들이다. 먼저, 유명한 휴양도시이기도 한 시데로 가보자. 시데의 바르바로스 거리는 옛날 이집트·그리스 도시국가 상인들이 드나들며 소금·면직 등을 사고팔던 아고라였다. 이 도시 유적엔 네크로폴리스는 없다. 외부의 공동묘역을 썼다고 한다. 시데의 유적 중 눈길을 끄는 곳이 각종 의식이나 공연·경기·전투훈련 등을 행하던 대규모 원형극장이다. 당시 극장은 권력자들이나 부유한 이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2층으로 이뤄진 무수한 계단식 대리석 좌석들엔, 자리마다 한쪽에 작은 홈이 파여 있다. 관람객이 입장료 명목으로 돈을 놓아두던 자리라고 한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이곳에 돈을 놓아두면 노예들을 시켜 거둬들였다. 공연자들은 원형의 일반 관람석이 아닌, 반대편의 핵심 권력자들 좌석을 향해 공연하고 행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무너져가는 흰 돌들이 이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건 눈부신 햇살과 짙푸른 하늘 때문만은 아니다. 바위산 자락, 야생 밀과 잡초들 우거진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무너져내리다 만 흰 기둥들과 건물 벽에는 들여다볼수록 빠져들게 하는 섬세한 그림과 무늬들이 채워져 있다. 그것들이 다 스스로 빛을 내며 반짝이는 발광체다.사갈라소스는 번성했을 당시 도시 경관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요정의 도시’ ‘열정의 도시’ 등으로 불리며 각국의 황제들이 모두 탐을 냈었다고 한다. 9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원형극장도, 냉·온탕까지 갖췄다는 목욕탕도, 시민들의 모임의 장소이자 장터였던 아고라도, 그리고 분수대·교회·도서관·절벽무덤들까지, 오랜 세월을 견뎌오느라 제 형상을 유지하지 못한 채 무너져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고대 도시국가들이 갖췄던 모든 구성 요소의 흔적들을 실감나게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종달새 울고 도마뱀 줄달음치는 탐방로를 따라 2~3시간이면 대충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 맨 위쪽에 자리 잡은 원형극장 무너진 돌무더기 위에 올라서면, 푸른 하늘 가운데서 소리 없이 명멸하는 크고 작은 뜬구름들과, 그 아래 또한 뜬구름 조각들처럼 흩어져 누운 옛 도시 흔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폐허가 된 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사갈라소스 유적은, 1706년 파울 루카스라는 프랑스의 탐험가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하지만 1985년에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영국·벨기에 합동발굴단이 본격 발굴을 시작했다.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병학은 한겨레신문 여행전문 기자다. 살아 있는 자연 경관과 사라져가는 옛것들에 관심이 많다. 『대한민국 마을 여행』, 『대한민국 도시 여행』, 『여행, 박물관 빼놓고는 말하지 말라』, 『놓치고 싶지 않은 우리 땅 참맛』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