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문화재단
수원문화재단
수원문화재단
수원문화재단
수원문화재단
7호 [책 나들이] 읽기의 혁명, 혁명의 읽기
읽기의 혁명, 혁명의 읽기
글 김병수 미술평론가
이 책은 특정 종교를 깎아내리고 그와 연관한 종교에게 이득을 안기려고 쓰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읽기의 혁명에 대한 고찰이다. 루터만이 아니라 무함마드를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문맹인 무함마드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사 가브리엘인 대천사 지브릴을 매개로 신의 말을 읽게 된다. 이슬람의 성전인 『코란』이란 ‘qur’ân’, ‘읽기’라는 의미의 말에서 온 것이다.
세상과 읽기는 단지 책을 통해서만 상호 접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읽기는 독서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문학 또한 우리가 예술의 일종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시와 소설로 이룩된 세계보다는 훨씬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공간이다. 매체 혹은 장르의 특성으로서 우리시대는 대중성과 시각성이 중심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또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종편에 넘쳐나는 평론가들은 그 첨병들 같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고(思考) 없는 말들은 사고(事故)를 내게 마련이다. 반면에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그냥 자기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은 ‘전체주의적’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읽기이다. 이미 발터 벤야민도 도시의 근대성 속에서 ‘조각 글’에 말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들을 유목(遊牧)의 사유로포장할 수도 있다. 이른바 논객들의 활동 장소이기도 하다. 읽기와 함께하는 것은 쓰기이다. 그런데 이태준은 『문장 강화』에서 문장 작법이란 글을 짓는다는 것에 대립해서 말을 짓기로 주장한다. “글짓기가 아니라 말 짓기라는데 더욱 선명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마음이요 생각이요 감정이다.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가까운 것은 글보다 말이다. ‘글 곧 말’이라는 글에 입각한 문장관은 구식이다. ‘말 곧 마음’이라는 말에 입각해 최단거리에서 표현을 계획해야 할것이다.” 역시 문학은 글과 연관 관계를 맺는다. 미술이상(象)과 불가분의 관계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말이 우선이란다.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의 문장 작법은 글을 어떻게 다듬을까에 주력해왔다. 그래 문자로 살되, 감정으로 죽이는 수가 많았다. 이제부터의 문장 작법은 글을 죽이더라도 먼저 말을 살려, 감정을 살려놓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파울 첼란의 시구에서 빌어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인터뷰 형식으로 이루어져서인지 존대어투로 번역을 하고 있다. 말의 감정으로 글의 사유를 이룩하고 있는 문학을 성취하는 방식이다.
지식정보 사회에서 다른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읽는 인간, ‘호모 레겐스(Homo Legens)’!현대는 더 이상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공공연하게 말해지고 가끔 시대착오적인 소동이 일어날 뿐이다. 그런 궁핍한 시대에 이런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어떨까? 종교에서 이루어지는 방식도 또한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주는 것’으로서 세계 혁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학은 종교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났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그래서 문학을 통한 혁명이었다. 그리고 문학으로서 법은 그 상관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이고, 그리스도교 세계 자체이다. 따라서 교회법은 단지 성직자의 내규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통치하는 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 교회법을 완전히 부정하고야 말았다. 그 후 이 구멍을 메우려 프로테스탄트파의 법학자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법치국가의 탄생으로 세속국가의 종교화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거기에서 산다. 전통과 가치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의미를 안다. 그런데 일방적인 애국의 강요는 근거 없는 신앙의 복종과 유사하다. 문학으로서 법이 혁명으로서 문학을 무력화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면 가만히 둘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용도 폐기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사회에서는 비즈니스의 보조제로서 인문학을 사용하려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을 말하는가? 혹은 문사철(文史哲)을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름답다거나 오락을 위한 언어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의미는 18세기가 되어야 나타난다. 오히려 문학을뜻하는 라틴어 littertura의 어원은 문자(littera)이다. 그래서 프랑스어에서는 이것은 쓰는 것, 쓰는 방법 그리고 읽고 쓰는데 필요한 문학적 학식을 일반을 의미했다.
지금 인문학은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지만 실상은 서양에서 그 둘은 나름의 갈등을 겪어 왔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문학과 역사에 철학을 덧붙여 하나의 꾸러미를 만들었다. 사사키 아타루는 훨씬 넓은 의미에서 문학을 논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문학의 기초존재론과 융·복합적 문학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루는 주제도 과감하고 다채로워지게 마련이다.
덧붙이자면, 문학의 읽기와 관련해서 미술의 보기도 함께 고려해본다면 훨씬 풍요로운 인문학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을 가두어서 보는 것만으로 한정하지 말고 가서 보는 것이야말로 그 특수한 성격임을 읽기를 통해 참조해야 한다. 가져와서 보거나 가지고 다니면서 보는 읽기와는 달리 반드시 가서 보아야 하는 것이 미술이다.
읽기는 보기에 대한 숙명을 다시 요청하고 있다.
김병수 미술평론가는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사 및 박사를 수료했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 국제위원을 역임했으며 제17회 월간미술대상(학술·평론)을 수상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하이퍼리얼』과 『트랜스리얼』이 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기획위원, 목원대 대학원 기독교미술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